기술이 현실에 내려앉게 할 맥락의 설계: 2026 DLX 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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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2, 23일 양일간 울산과학기술원(UNIST)에서 도쿄대학교 DLX 디자인랩과 UNIST 디자인학과가 기술의 수용과 전유(adoption and appropriation)를 주제로 공동 기획한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이 주관하는 디지털융합디자인 전문인력양성사업(DT)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 자리에는 UNIST뿐 아니라 성신여자대학교와 한서대학교에서도 총 24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DLX의 공동 연구실장 페데리코 트루키아(Federico Trucchia)와 연구원 제나 왕(Jenna Wang)이 프로그램을 기획부터 현장 진행까지 이끌었다.
Design Led ‘X’를 의미하는 DLX는 도쿄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Institute of Industrial Science) 산하 연구 기관으로 디자인의 관점에서 학계에서 개발된 기술과 실생활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워크숍의 주요 방법론인 ‘트레저 헌팅(Treasure Hunting)’ 역시 여기서 출발하는데, 디자이너와 과학자를 한 팀으로 묶어 아직 쓰임이 정해지지 않은 최첨단 기술이 사람의 삶과 맞닿는 가능성을 발굴하는 것이 그 목표다. 이 방법론은 짧고 집중적인 스프린트로 추상적인 데이터와 소재, 기술을 손에 잡히는 개념과 시나리오로 옮겨 기술과 삶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2026년 DLX 워크숍은 이 방법론을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압축해 경험해보는 자리였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도쿄대학교에서 보다 지속가능한 콘크리트 소재를 다루는 연구실인 사카이 랩(Sakai Lab)과 자연의 움직임을 활용한 로보틱스를 연구하는 BIRL 랩(BIRL Lab)이 주제를 제공했고, 여섯 개 참여자 팀 중 세 팀은 콘크리트를, 나머지 세 팀은 로보틱스를 맡아 각 연구실이 쥐고 있는 기술로부터 새로운 디자인과 시나리오를 탐험했다.
1일차, 최악의 아이디어부터 시작하기


워크숍의 첫날은 마시멜로 챌린지로 팀워크를 다지며 가볍게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이어진 기술 상호작용 사례 연구와 디자인 챌린지 브리핑은 참여자들에게 꽤나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Humane AI Pin, 구글 글래스, 그리고 악용되어 논란이 되었던 애플 에어태그 등의 실제 사례를 살펴본 것은 우리에게 ‘기술이 가능하게 한 상호작용이 과연 문화적으로 적합하며 우리의 삶에 진정한 가치를 더하고 있는가?’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핵심 디자인 챌린지는 다음과 같았다:
- 어떤 상황(Situation)에서
- 누가(Someone)가
- 무엇(Something)을 사용하여
- 어떤 행동(Action)을 수행하는가?
- 이 기술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What could not occur without this technology?)
특히 “이 기술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틀간의 아이디에이션 과정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단순히 보기 좋은 형태를 제안하거나 기존의 방안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억지로 포장하는 것을 넘어, 기술이 인간, 자연, 건축, 식생(vegetation) 등 다양한 대상과 맺는 상호작용의 파급력을 꼼꼼히 따져보는 시간이었다. 이는 기술을 활용함에 있어 형태적 유희를 넘어선 깊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오후의 아이디어 발산 세션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시작됐다. 첫 워밍업 주제가 “당신의 최악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라(Share your worst idea)”였고, 주어진 시간은 몇십 초 남짓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 촉박함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발상을 끌어내는 훌륭한 장치였다. 이 아이디어가 비현실적이지는 않을지, 딱히 좋은 점이 없는 건 아닐지 스스로 검토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퍼실리테이터들은 ‘판단하지 않겠다’는 원칙 아래 어떤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괜찮다고 내내 독려했다. 스스로 그어둔 생각의 한계선을 넘게 만드는 방식이었고, 이는 워크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아이디에이션에서는 주제 카드와 맥락 카드를 활용하였다. 각 연구 주제마다 다섯 장의 주제 카드가 주어졌는데, 자연의 움직임을 모사한 로봇이나 부드럽고 유연한 소재의 로봇 같은 식이다. 여기에 ‘Blow’, ‘Makeup’, ‘Movement’, ‘Disposable’ 같은 키워드가 적힌 맥락 카드나 전혀 관계없는 그림 카드를 무작위로 뽑아 엮으면서, 그 이미지가 환기하는 맥락과 기술을 억지로라도 결합해보는 방식이었는데, 머릿속의 익숙한 회로가 애초에 닿지 못하는 곳으로 생각을 밀어내는 효과가 있었다.
몇 라운드에 걸쳐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팀원끼리 공유한 뒤, 축(axis)을 세운 2×2 매트릭스 위에 아이디어들을 배치하고 닷 보팅(Dot voting)으로 하나를 골랐다. 축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같은 아이디어의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에, 축을 논의하는 과정 자체가 팀의 관점을 정리하는 과정이 되었다. ‘유니콘을 노려라(go for the unicorn)’라는 말처럼, 안전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매트릭스의 가장 극단에 있는 아이디어를 찾는 일이었다.
선택된 아이디어는 곧바로 시나리오로 발전시켰다. 데스크 리서치로 이야기에 근거와 살을 붙이고, ‘학교에서’, ‘운전 중일 때’처럼 맥락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풀어냈다. 그렇게 정리한 상황을 스토리보드에 옮겨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사용하는지를 장면 단위로 그려낸 뒤 그날 마지막 발표에서 다른 팀들과 공유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를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기술이 놓일 맥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는 일이었다. 발표 이후 다른 사람들이 건넨 질문과 활발한 피드백 속에서, 팀 내부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빈틈이나 전혀 다른 각도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지만 유익했던 첫날이 마무리 되었다.
2일차, 만질 수 있는 이야기로


둘째 날은 전날 어렴풋이 잡힌 개념과 시나리오를 만질 수 있고(touchable) 반응하는(interactive) 실물 프로토타입으로 구현해내는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제품보다 핵심적인 인터랙션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단 몇 시간 만에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고 상호작용을 시각화하는 작업은 숨 가쁘고 강렬했지만, 끊임없는 시간의 압박은 역설적으로 프로젝트가 늘어지는 것을 막는 훌륭한 촉매가 되었다.


최종 발표 역시 인상적이었다. 정형화된 파워포인트 방식을 배제하고, 직접 제작한 프로토타입과 포스터만을 활용해 10분간 롤플레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청중의 참여를 유도하며 실제 상황처럼 연출된 덕분에, 발표는 딱딱한 기술적 설명이 아니라 상황의 재현이 되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기술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었다.
발굴해 낸 보물들


현장에 없었던 독자들을 위해 여섯 개의 아이디어 중 인상 깊었던 콘셉트 두 개를 소개한다:
MIYADO는 지진과 쓰나미로 발생한 콘크리트 잔해를 업사이클해, 해안 방재 시설을 해양 생물의 새로운 서식지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다. 새로운 시멘트를 첨가하지 않고 재난 폐콘크리트를 분말로 분쇄한 뒤 압축·경화함으로써 탄소 배출을 줄이는 동시에, 기존 콘크리트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곡면과 유기적 형태, 다양한 표면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MIYADO는 이 소재의 뛰어난 조형성을 활용해 작은 콘크리트 조각을 직물처럼 연결한 유연한 매트를 만들고, 이를 평평하고 매끄러운 기존 방파제 위에 덧입힌다. 그 결과 도시를 보호하던 회색 방파제는 해조류와 조개류가 부착해 살아갈 수 있는 입체적인 서식지로 확장된다. 재난 폐기물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생 콘크리트만의 새로운 가능성을 통해 해안 보호와 해양 생태계 복원을 동시에 실현한다는 점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참여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Wiggle Rewinder는 산불과 사막화로 황폐해진 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지렁이 로봇이다. 산불이 지나간 뒤 토양은 급격히 산성화되고 미생물 생태계는 완전히 파괴되는데, 토양이 온전히 회복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리기도 한다. 현재의 방법으로는 회복 물질을 땅속 깊이 전달하거나 물과 공기, 영양분이 지나갈 통로를 만들어주기 어렵다. Wiggle Rewinder는 지렁이의 연동 운동을 모사해 스스로 토양을 파고들며 그 길을 낸다.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을 위한 기술이자, 공원 관리인과 자연보호 담당관, 환경 감시원처럼 자연의 회복을 업으로 삼는 이들을 위한 도구다.
두 결과물 모두 기술을 단순히 기존 제품에 덧붙이는 대신, 기술의 특성이 새로운 상황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기술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술이 필요한 사람과 상황, 그리고 기술을 통해 달라지는 행동까지 하나의 시나리오로 연결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마치며

돌이켜보면 팀 활동 그 자체가 이번 워크숍에서 얻은 하나의 배움이었다. 한 팀 안에서도 HCI, 제품디자인, HAI, HRI, 서비스디자인 등 서로 다른 관심과 전문성을 가진 학생들이 모였고, 같은 주제, 나아가 같은 아이디어를 두고도 먼저 눈길이 가는 지점이 저마다 달랐다. 인터랙션의 흐름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있었고, 형태와 제작 가능성을 먼저 따지는 사람이 있었으며, 사용자의 여정 전체를 먼저 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시선이 다른 만큼 한 사람이라면 놓쳤을 지점들이 자연스럽게 채워졌고,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설득해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값진 배움이었다. 전공의 경계를 넘나들며 협업하는 경험이야말로 이번 워크숍이 남긴 가장 큰 수확 중 하나였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가능성을 검증할 수는 없었다. 시나리오와 프로토타입이 그 자체로 완결된 결과물은 아니지만, 기술을 앞에 두고 상황을 먼저 묻는 순서를 익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트레저 헌팅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과학 기술 연구 속에 숨겨진 잠재력을 디자인을 통해 발굴하는 이 과정은 그 이름처럼 진정한 의미의 보물찾기의 과정이었다. 기술 연구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면, 디자인은 그 가능성이 어떤 사람과 공간,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연구실 안의 기술이 디자인 과정을 거쳐 어떻게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결과물로 발전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이번 경험은, 앞으로의 학업과 연구에도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글 이정무 · 류성원, 유니스트 디자인학과 석사과정